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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질 수도 있고 굴러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타잖아요. 거기에 빗대서 줄 타는 사람을 ‘어름산이’라 불렀어요.” 얼음산을 올라타듯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어름산이란 말의 유래가 무색하게 그는 줄 위를 거침없이 활보한다. 약 3m 높이로 설치된 8~9m 길이의 줄이 그의 무대다. 줄 위를 걷다가 뛰기도 하고, 줄에 가랑이를 걸치고 내려앉았다가 몸을 튕겨 뛰어올라서는 빙글 돌아 다시 줄에 앉기도 한다. 공연 내내 관객을 움찔하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지만 무대 아래엔 어떤 보호 장치도 없다. “보통 한 번에 30~40분 정도 타요. 우리나라 줄은 한두 시간씩 탈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거든요. 관객과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어우러져야 하니까…. 그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해요.” 권원태의 줄타기 무대는 조선 시대 유랑 예인들이 펼치던 전통 민속 공연 남사당놀이의 한 종류이다. 하지만 최근엔 각종 축제에서 줄타기 공연만 단독으로 치르는 경우도 많다. 외국의 서커스 공연단이 줄 위에서 곡예를 완성하는 시각 위주의 무대를 꾸리는 데 비해 남사당 줄꾼은 이야기꾼 역할까지 소화하며 재담과 기예를 동시에 선보인다. 그 시작이 서민들의 볕 들 일 없는 삶에 위로와 활력을 전하던 민중의 놀이였기 때문이다. “줄타기 동작이나 재담의 기본 틀은 전승되는 것을 따릅니다. 하지만 지역이나 장소, 사회적 이슈, 관객의 호응도 등에 따라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져요. 기술의 가짓수요? 재주를 몇 개나 보여 주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죠. 상황에 따라서 응용 기술이 즉흥적으로 들어가기도 하니까요.” 줄꾼의 무대줄은 줄타기 무대의 전부이자 줄꾼이 넘어야 할 전부이다. 그에게 줄에 대해 물었다. 그가 쓰는 줄은 어떤 줄이고, 서커스 공연의 줄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2004년 미국 플로리다 탬파베이에서 열린 ‘세계의 최고 기록-줄타기’ 부문에서 19초 33 만에 주파해 그를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했던 50m 줄, 그리고 2007년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줄타기 명인들이 참여했던 ‘한강 횡단 세계 줄타기 대회’에서 17분 6초의 기록을 내게 했던 1km 줄은 도대체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런 데선 쇠줄을 써요. 쇠줄은 강하고 팽팽해서 흔들림이 없죠. 그 줄은 두께가 3cm고, 양쪽에서 당기는 장력이 35t이에요. 줄이 안 끊어지고 버틸 수 있는 하중의 최대치가 35t인 겁니다. 사람들이 그 힘을 이용해 올라가서 퍼포먼스를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줄은 나일론 재질이라서 부드럽단 말이에요. 출렁출렁 낭창낭창한 느낌에 우리 줄의 멋이 있어요. 그만큼 줄 위에서 중심 잡는 건 힘들겠죠. 쇠줄과 나일론 줄을 딛는 느낌을 비교하자면 땅바닥에서 그냥 뛸 때와 발이 쑥쑥 들어가는 모래밭을 뛸 때 정도 되겠네요.” 같은 나일론 줄이라도 탄성이 조금씩 다르고, 어떤 탄성의 줄을 선택할 것인지는 줄꾼의 취향이라고 했다. 탄성이 다른 줄을 때때로 섞어서 쓰기도 하는지 물었다. 그는 이마의 주름을 깊게 만들더니 곧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줄은 예민한 거예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그래서 줄꾼이 줄을 함부로 바꿔 쓰는 일은 쉽지 않아요.”40년 넘게 줄을 타 온 권원태 씨가 “한국의 전통 줄타기는 단순히 기예를 뽐내는 차원이 아니라 재담으로 관중과 소통하는 민중 놀이의 하나”임을 강조한다.9살에 줄 위에 서다그의 공연 영상을 다시 봤다. 줄꾼의 움직임만 보이던 시야에 흔들리는 줄의 곡선까지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땅에서 벗어난 사람의 움직임, 한 사람의 무게를 받아 내는 줄의 움직임이 그런 것이었나. 줄 위를 걷던 그는 부채를 펴더니 허공에 작은 곡선들을 그리기도 했다. 관객이 풍류라는 부채의 이미지에 취할 때 그는 그 부채로 바람의 저항을 제어하며 중심을 잡았다. 외줄에 의지해 허공을 가르는 그가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은 바람이고, 그 바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부채다. “부채 들고 바람 한번 날려 보세요. 무게감을 느끼잖아요. 그 무게로 중심을 잡을 수 있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부채를 들었는데 바람이 세게 불면 낙하산 효과가 나겠죠. 중심 잡는 방법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줄타기에서 가장 넘기 힘든 산은 무엇일까. 줄꾼은 무엇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을까. 그는 질문을 받고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줄을 연습하는 건 성장하는 과정이에요. 사람 몸이 크면서 또 뇌도 성숙하면서 줄 기술도 같이 발전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어떤 단계를 넘었다, 무엇을 마스터했다, 단순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공연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무르익으며 완성도가 안정권에 들어가요. 줄이라는 건 그래요.” 문답이 이어질수록 권원태의 줄타기는 기예의 영역을 점점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삶과 마음을 비추기 시작했다. 광대로 살던 그의 부모는 아홉 살 아들을 무작정 유랑 예인 극단에 입단시켰다. 그는 강요된 삶의 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유년기 이후의 삶이 줄타기와 분리되지 않았고, 줄꾼으로 성장해 가는 시간은 곧 권원태라는 사람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삶과 연습이 밀착된 총체적인 배움이 지속될 뿐이었다. ‘줄 위에서 커 버린 사람의 세월’이 당사자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그 기억을 시간의 단위로 나눌 수 있을까. 그는 ‘10년 차 실력’ 따위의 ‘숫자로 환산하는 능력값’에 저항감부터 드러냈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 얘기해야 한다면…. 10년 정도 했을 땐 패기가 있죠. 겁도 없고. 그런데 느낌이 없는 거죠. 반복된 학습을 쫓아가기 바쁘니까요. 20년쯤 돼야 어느 정도 느낌을 내고 몸의 컨디션에 맞게끔 줄을 탈 수 있어요. 이후엔 ‘내 몸 상태가 이러니까 오늘은 이 선에서 이렇게 해 보자’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요. 40년을 탔지만 아직도 완벽해진 게 아니에요. 지금도 날씨가 꿉꿉하면 줄도, 몸도 무거워요. 그건 어떻게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줄타기는 정해 놓은 것 없이 상황에 따라서 다이내믹하게 흐르는 익스트림 스포츠 같아요.” 시종일관 건조한 대답을 이어가던 그가 격정적으로 변한 것은 ‘줄의 높이’를 논하던 대목이었다. 3m라는 수치를 확인하려는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줄의 높이가 얼마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죠. 3m 높이의 지형물과 3m 높이의 외줄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높이의 차이는 위험과 공포감의 차이예요. 굳이 위험수를 둬서 5m 높이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 이유죠. 우리나라 줄문화는 아찔한 계곡 위에서 줄타기하는 그런 기예가 아니에요. 관객 눈을 맞추고 대화하면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지.” 그가 말했다. 며칠 젓가락 안 쓴다고 젓가락질을 잊어버리지 않듯 줄꾼에게 줄은 그렇단다. 연습하다 삐끗하면 다칠 수 있으니 요즘엔 연습 없이 바로 공연에 들어간다고 했다. 때때로 공연 중에 사고를 겪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선 좀처럼 복기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줄에 설 때마다 두려움이 다른 모습, 다른 깊이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줄타기의 전부는 사고의 두려움으로부터 초연해지는 모든 행동과 자세였다. 적잖은 마인드 트레이닝이 요구될 것 같았지만, 그의 답은 의외였다. “복잡하게 생각 안 해요. 그냥 이건 내 직업이다, 단지 직업에 위험이 따르니까 조심하자, 그 정도로만 생각하려 해요. 그리고 평소에도 늘 조심하는 거죠. 살아 있는 생명체는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든가, 특히 날짐승은 절대 해코지하지도, 먹지도 않죠. 내가 늘 높은 데 있는 사람이라….”줄꾼의 움직임만 보이던 시야에 흔들리는 줄의 곡선까지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땅에서 벗어난 사람의 움직임, 한 사람의 무게를 받아 내는 줄의 움직임이 그런 것이었나.권원태 명인이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 잔디광장에서 기예를 펼치고 있다. 한 손에 든 부채는 그가 줄 위에서 바람의 저항을 제어하며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인생은 줄이다두려움과 공포는 멋대로 출몰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40년의 경험으로도 제어하기 어려웠던 걸까. 그는 그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그저 거리를 두고 설 뿐이었고, 불운의 기운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스스로를 막연하게 방어할 뿐이었다. 그 대신 통제할 수 있는 것에서만큼은 어떤 미진함이나 모호함도 허락지 않았다. “줄을 매는 일은 당연히 직접 하죠. 지지대 세울 때 줄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하중을 받을 수 있는 땅인지 꼼꼼히 살피고, 장력을 가늠해서 줄을 직접 걸어요. 예를 들어서 빳빳하게 맨 줄이 잘못 묶여서 한 뼘만큼 붙어 버릴 때 그 줄이 내 몸에 전해지는 충격은 어마어마하거든요. 나한테 익숙한 줄의 느낌, 그런 줄의 탄성은 나만 알아요. 거기에 맞춰 거는 거죠.” 자신의 방식대로 줄 위의 물리학적 힘의 분배까지 설명하는 줄꾼.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이공 계통의 일을 찾았을 거라고 했다. 특히 기계 다루는 일을 좋아해서 지금도 간단한 기계의 부품 정도는 직접 만들어 쓸 정도라고, 그런 업에 몸담았으면 조금 더 성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 삶이 못 이룬 꿈으로 남은 것인지를 물으니, 꿈 꾼 적은 없노라고 잘라 말했다. “먹고 살 거 걱정만 하지 않는다면 이 일이 아주 멋진 직업이에요. 줄 하나 잘 배워서 해외도 다니고, 남들에게 ‘권 선생’으로 불리면서 존중도 받고 하니까요. 또 기네스북에도 이름을 올렸잖아요. 제가 30초 동안 거중돌기(공중으로 뛰어올라 180° 돈 후 줄 위에 앉기) 12번 기록을 세웠거든요. 이만하면 행복한 인생 아닐까요.” 그뿐 아니다. 그가 이수 과정을 마치고 ‘명인’의 호칭을 얻은 남사당놀이는 대한민국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인 동시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그는 인생은 곧 줄이라고 했다.“태어날 때 뭐 잡고 태어나죠? 그래요, 탯줄이죠. 새 생명은 가는 줄로 배냇저고리 입고 인생을 시작하죠. 또 인생사 사는 데 줄을 잘 서야죠? 똑바로 앞만 보고 가야되는데 옆으로 새면 나쁜 곳으로 빠지잖아요. 줄 위에서 바람 불어 휘청휘청할 때도 있겠지만 중심 잡고 똑바로 가야죠. 마지막엔 어디로 가나요. 삼실에 묶여서 한 줌의 재로 끝나버리잖아요. 인생은 줄로 시작해서 줄로 끝나는 거예요.” 그는 일상에서 줄이 안 들어가는 데가 어디 있느냐며 그제야 웃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인생줄 어디쯤에 서 있을까. 그 줄 위에서 얼마만큼 가벼운 몸으로, 또 얼마만큼 기쁘게 뛰고 놀았을까. 줄꾼이 던진 화두에 오늘이 그가 딛는 줄처럼 오래도록 출렁인다. - 강신재 자유기고가국가무형문화재 58호 ‘줄타기’의 예능 보유자인 김대균 명인이 어릿광대로, 한산하 전수자가 줄광대로 그림책에 맞추어 펼치는 재담, 그리고 해금, 대금, 향피리, 아쟁, 장구, 북의 삼현육각 연주를 들으며 줄타기 공연에 흠뻑 빠져든다. 페이지를 넘기며 소리를 듣고, 공연을 보는 시각, 청각, 촉각을 통합하는 공감각적 경험이다. 재담과 묘기, 음악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 생동감 있는 타이포그래피로 매력을 한층 더한다.경복궁 상월대 서쪽에는 해학적인 모습의 백호(白虎·흰 호랑이) 석상이 있다. 백호는 사방을 지키는 신성한 동물, 즉 사신(四神) 중 서쪽을 지키는 신수다. 옛사람들은 호랑이가 역병을 물리친다고 믿어 신년이면 벽에 호랑이 그림을 붙여놓곤 했다. 김선규 기자60년 전 사라진 경복궁 근정전 향로 뚜껑다시 만들어 앉혔다2025.123 24일부터 상시 공개재현한 뚜껑을 얹어 원래 모습을 되찾은 경복궁 근정전 향로. 국가유산청 제공경복궁 근정전 앞 큰 향로의 몸체를 100여년간 덮고 있다가 홀연히 사라졌던 뚜껑이 복원됐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는 60여년 전 유실된 근정전 향로 뚜껑 두점을 최근 다시 만들었으며, 기존 향로 몸체에 새 뚜껑을 얹어 복원한 모습을 2025. 12. 24일부터 상시 공개한다고 23일 밝혔다. 근정전 향로는 조선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궁중 유물들 가운데 하나다. 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 서쪽에 있던 큰 종을 녹여 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근정전 건물 양옆에 크기와 형태가 같은 두개의 향로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각각 두개의 손잡이와 세개의 발이 달린 정(鼎:솥) 형태의 몸체, 용을 형상화한 뚜껑으로 이뤄져 있었다. 국가유산청은 1961∼1962년 양쪽 향로의 뚜껑이 모두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어떤 경위로 사라졌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관리소 쪽은 “관련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 의견을 바탕으로 향로 뚜껑 재현을 추진했다”며 “국가무형유산 주철장 원광식 보유자, 원천수 이수자가 참여해 재현품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 노형석 한겨례신문 기자 무분별한 개발로 사라진 유네스코 세계유산도 있다'리버풀 해양 무역도시' 지난 2021. 7월 31일에 막을 내린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중국 푸저우에서 개최됐지만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열렸다. 이번 위원회에서는 ‘한국의 갯벌’을 포함해 자연유산 5건, 문화유산 28건이 새롭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고, 영국의 ‘리버풀, 해양 무역도시’는 세계유산목록에서 삭제됐다. 1,000건이 넘는 세계유산 중 이제까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가 삭제된 것은 2007년 오만의 아라비안 오릭스 영양 보호구역과 2009년 독일의 드레스덴 엘베 계곡에 이어 이번 리버풀까지 단 세 건 뿐이다.‘리버풀, 해양 무역 도시’는 18~19세기 대영제국의 부두 건설과 항만 경영의 기술을 보여주며, 세계 무역 항구도시의 탁월한 사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등재 결정문에는 개발과 관련된 신규 건축 사업이 예정되어 있으니, 세계유산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적절한 보호관리방법을 잘 시행하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해당 국가가 등재 결정문의 요구 사항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는 이후에 계속 검토하게 된다.리버풀의 보존관리 문제는 2006년부터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 왔다. 2012년 36차 위원회에서는 리버풀 부두 개발계획에 대한 극도의 우려와 함께 만약 현재의 개발계획이 시행되면 세계유산목록에서 삭제하겠다는 것을 결정문에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리버풀처럼 ‘위험에 처한 유산’으로 등재되고 나면 의무적으로 보존 현황 보고서와 더불어 지적된 위험 사항을 제거하는 적절한 계획을 제출해 위원회의 검토·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영국은 보고서를 냈고, 위원회는 검토했지만, 결국 등재 17년 만에 세계유산목록에서 삭제되고 말았다.세계유산은 전 인류가 모두 함께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을 표방하며 운영되는 제도다. 때문에 등재 취소는 국적에 상관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결정이 리버풀의 역사적 가치 보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 염려된다. 또한 신규개발이 세계유산 삭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지역 주민, 개발업자,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중앙 정부가 충분히 인지했는지 확인해야 하며, 만약 세계유산보다 개발을 선택했다면 어떠한 판단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상세히 알아봐야 할 것이다.리버풀 사례를 통해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세계유산은 국제사회가 새로운 기준이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닌, 애초 해당국가가 제시한 보존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는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도 보유하고 있는 15건의 세계유산을 얼마나 잘 보호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그리고, 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유산은 제시하고자 하는 약속의 실현 가능성과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점을 꼼꼼히 따져보고, 모든 참여 주체가 공유하고 동의하는 방안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임경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 학예연구관) 리버풀의 해양 무역도시의 야경.처음 가보는 문화재 유적지도 '척척'문화재 GIS 문화재 공간정보서비스(GIS)를 통해 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주변의 문화재 분포. / 문화재공간정보시스템(문화재GIS)을 통해 본 경상북도 경주 인근의 신라시대 유적지. 생판 모르는 길을 찾아 갈 때 세상이 편해졌다는 말이 실감 난다. 전국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답사를 주 ‘업(業)’으로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검색창에 가고 싶은 유적지 명칭만 입력해도 손쉬운 길 안내를 받아 헤매지 않고 찾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손쉬운 초행길 탐사가 가능한 것은 문화유산을 전자지도에 탑재한 문화재 공간정보서비스(Geographic Infomation System·이하 GIS)사업의 결과다. 2001년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20년 간 진행해 오고 있는 문화재 GIS사업의 진행 절차는 ‘수치지형도’에 수많은 전국의 문화재를 점과 면 형태의 자료로 입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광범위한 문화재 현장조사가 이뤄져야 하고, 조사한 개별 유적의 위치를 정밀한 장비로 측정한 ‘수치’가 확보돼야만 한다. 말이 쉽지 유적들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봉수, 유물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드넓은 유물산포지의 범위를 확인하는 과정, 문헌에는 남아 있는데 이미 없어져 버린 유적을 찾고 확인하는 일 등 아마도 문화재조사 중 가장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 현장조사의 결과가 바로 전국 지방자치단체별로 제작된 ‘문화유적분포지도’인데 총 250여 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개별 유적의 입력된 정보를 다시 수치지형도에 한 층으로 입혀서 문화재분포라는 전자지도상의 레이어를 만들게 된다.문화재GIS 개발의 목적은 문화재 관리 효율성을 높이는 것과 더불어 국토개발사업 과정에서 미리 보존의 대책을 수립하고 중요한 유적의 존재 여부를 예측해서 개발과 보존의 균형을 꾀함에 있다. 답사길 안내라는 편의성부터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성을 보존하는 중요한 정책을 수립하는 근거까지 매우 중차대하고 꼭 필요했던 사업인 셈이다. 필자도 국토개발사업을 진행하는 사업 수행자 입장에서 이런 GIS사업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발과정에 참여했었다. 세상의 편리함을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실은 미래를 바라보며 미리 준비해 수요를 예측한 문화재청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김충배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조선 왕조의 태실 경북 성주군의 세종대왕자 태실(胎室).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왕자 18명의 태실과 단종의 태실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모여있어요. /남강호 기자조선 왕조의 태실(胎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회의가 지난 2일 경북·경기·충남 광역자치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 성주에서 열렸다고 해요. 이 세 지역은 국내 대표적인 태실 유적이 있는 곳입니다. 태실이 뭐길래 세계유산 등재까지 추진하는 걸까요? 왕실 자손의 ‘태’를 묻는 독특한 풍습세계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 왕실의 독특한 문화가 바로 태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실을 간단히 설명하면,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했을 때 그 태(胎)를 길지(吉地·풍수지리에서 후손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믿는 터)에 묻고 만든 시설이에요. ‘태’라는 것은 태반이나 탯줄처럼 태아를 둘러싼 조직을 말하죠. 그런데 이것을 왜 길지에 묻고 관련 시설을 세웠던 것일까요? 그것은 ‘생명의 시작을 함께하는 태는 아이의 운명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답니다. 왕실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면, 아기의 태는 즉시 백자 항아리에 소중하게 담기게 됐어요. 그리고 미리 점지해 놓은 길방(吉房·길한 방)에 뒀다가 탄생 3일째 되는 날 태를 꺼낸 뒤 깨끗이 씻었습니다. 항아리 바닥에 동전 한 닢을 넣고 기름종이와 남색 명주로 항아리를 덮은 뒤 붉은색 끈으로 묶었습니다. 이처럼 정성스럽게 밀봉한 항아리, 즉 태항아리를 땅에 묻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전국에서 이름난 길지(명당)를 찾았죠. 이렇게 묻는 것을 태봉(胎封)이라 했고, 묻은 곳을 태실이라고 했어요.경기 고양 서삼릉 내 태실. 전국에서 옮겨진 54기의 태실이 집단 조성돼 있습니다. /고운호 기자”생명 존중이라는 보편적 가치 구현”조선 왕실에선 이렇게 출산 이후 태를 잘 갈무리(정리하거나 간수함)하는 일이 아기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여겼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먼저 땅에 묻는다는 게 현대인의 시각으론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탄생과 생명의 시작이라는 데 커다란 의의를 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실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서양은 물론 인근 중국·일본 등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생명 존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구현에 부합한다”고 말합니다. 백자로 만든 태항아리. 제작 시기를 명시한 태지석이 함께 발견되지 않아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태실은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왕릉이라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들어야 했지만 태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확인된 태실은 모두 182곳으로, 경북 101곳, 경기도 65곳, 충남 16곳 등입니다. 이 중에서 24곳이 보물·사적 등 국가지정문화재인데, 보물로 지정된 곳은 충남 서산의 명종 태실과 경북 영천의 인종 태실입니다. 지난해 2022. 8월 보물로 지정된 인종 태실은 다른 태실보다 규모가 큰 데다 ‘세부 장식이나 조각 기법이 우수해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 경북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자(세종대왕의 왕자) 태실은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 중 문종을 제외한 태실 18기와 단종의 태실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태실에 깃들었던 어두운 역사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아버지 세종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1442년(세종 24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아들들 태실을 성주에 모으도록 한 것이죠. 그런데 세종의 둘째 아들인 7대 세조 임금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성주 태실에는 한바탕 참사가 닥치게 됩니다. 1458년(세조 4년), 세조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세조의 동생 안평대군·금성대군과 한남군·화의군 등의 태실이 왕명에 의해 훼손됐습니다. 형제의 태를 한 장소로 집결시켜 서로 우애를 잃지 않을 것을 바랐던 아버지 세종의 뜻과 달리, 권력을 다투는 과정에서 이미 죽였거나 유배를 보낸 동생들의 태실마저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1581년(선조 14년) 만들어진 태지석. /한국학중앙연구원태실이 또 한 번 위기를 맞은 건 1920년대 말 일제에 의해서였습니다. 총독부는 ‘태실 관리가 미흡해서 훼손이나 도난의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전국의 태실 54곳을 파내 태항아리를 꺼냈던 것입니다. 대신 경기 고양의 서삼릉에 태실 54개를 집단 조성해 이곳으로 모두 옮겼죠. 이에 대해 일각에선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만행이었다’ ‘태항아리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술수였다’고 보기도 하죠. ‘관리의 효율성은 높아졌을 수 있지만 태실 본래의 역사적 맥락은 훼손됐다’는 냉정한 평가도 있습니다. 광복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서삼릉을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태항아리들을 수습했고, 이후 문화재청 산하 기관인 국립고궁박물관이 이 항아리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태항아리는 용도를 떠나 그 자체로도 훌륭한 도자 문화유산으로 여겨집니다. [숙종 임금의 태항아리]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은 2021년 9월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로 조선 19대 임금 숙종(재위 1674~1720)의 태항아리를 선정했어요. 태항아리는 태를 담는 작은 내(內)항아리와 그 항아리를 담는 커다란 외(外)항아리로 구성됐는데, 숙종 태항아리의 높이는 외항아리가 31.2㎝, 내항아리가 17.3㎝입니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살아있는 백자 항아리로 평가되죠. 숙종 임금의 태항아리와 태지석(胎誌石). /문화재청태항아리는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묻혔는데, 태지석이란 태어난 사람이 누구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를 새겨 놓은 돌입니다. 숙종의 태지석엔 이렇게 적혀 있어요. ‘辛丑年(신축년) 八月(팔월) 十五日(십오일) 卯時生(묘시생) 元子(원자) 阿只氏(아지씨) 胎(태).’ 신축년인 1661년(현종 2년) 8월 15일, 오전 5~7시에 해당하는 묘시에 태어난 ‘원자 아지씨’의 태라는 것이죠. ‘원자’는 왕비가 낳은 맏아들(적장자)로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아지씨’는 우리말 ‘아기씨’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사실 태지석에 ‘원자 아기씨’라고 적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왕조에서 드문 경우입니다. 조금 의외일 수도 있겠는데, 조선 역대 임금 27명 중에서 원자로 태어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숙종과 연산군(10대), 인종(12대), 순종(27대)까지 4명뿐입니다. 출생 당시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거나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4명 중에서도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거나(연산군) 일찍 죽거나(인종) 아예 나라가 망하지(순종) 않고 오래 왕 노릇을 했던 사람은 숙종밖에는 없었어요.- 유석재, 안영 조선일보 기자경기지역 조선왕실 태봉·태실 65곳 확인, 조사 보고서 발간경기도는 지난 3년간 실태 조사를 벌여 도내에 실제 존재하는 조선 왕실 태봉(胎峰)과 태실(胎室) 65곳을 확인했다. 경기도는 2021.12. 19일 이런 조사 성과를 담은 400여쪽의 '경기도 태봉·태실 보고서'를 발간했다.가평 중종 태실 / 광주 원당리 태실 발굴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한 뒤 길지를 택해 태반과 탯줄을 봉안하는 공간으로, 아기의 건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태봉은 태를 봉인한 산봉우리다. 태실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다수가 사라진데다가 관련 책자마다 기록이 달라 실존 여부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도는 경기문화재연구원과 2019년부터 문헌기록 확인, 역사자료 분석, 현장 조사 등을 거쳐 도내 19개 시군에서 태봉 30곳과 태실 35곳을 확인했다. 보고서에는 안산시 고잔동에 숙종 왕녀의 태실, 양주시 덕정동의 태봉 등이 정리돼 있고, 지난 10월 도가 처음으로 자체 발굴한 광주 원당리 태실도 포함돼 있다. 특히 태실 보존에 애쓴 도민의 노력과 관련 자료도 보고서에 담아 의미를 더했다. 양평 대흥리 태실이 도굴당한 1972년 3월 2일 당시 태지석(태의 주인공 이름과 출생일을 기록한 돌) 명문을 옮겨 적은 이희원(83·양평군) 씨의 일기장은 대흥리 태실이 조선 성종의 왕자 부수(富壽)의 태실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됐다. 이희원씨 일기장 / 보고서 표지 훼손된 포천 성동리 익종 태실과 포금주리 태실의 실물 보존을 위해 노력해온 이응수(67·포천시) 씨의 노력도 담겨 있다. 도는 태실 유적에 안내판과 울타리를 설치하는 한편 광주 원당리 태실처럼 지속해서 발굴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희완 도 문화유산과장은 이번 조사보고서는 3년간 노력의 성과물로, 그동안 태봉·태실을 지켜온 도민들의 숨은 노력도 발굴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칠궁에 있는 사당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인 육상궁과 연호궁 전경.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캡처경복궁 칠궁(七宮)왕의 어머니를 모신 곳 조선의 후궁은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그림자들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왕이 되어도 그녀를 ‘왕의 어머니다!’라고 복권해 주는 것만 해도 하세월이 걸렸다. 칠궁을 걸으며 마음이 심란해진 것은 꼭 떠나는 가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문에서 본 재실과 가을이 깊어진 북악산 모습 궁궐이 아니라 사당이다칠궁은 일곱 채의 집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자세히는 귀신이 사는 일곱 채의 집으로 해석할 수 있다. 궁궐의 궁 자는 집 궁(宮) 자이지만, 그 뜻 가운데에는 귀신이 사는 집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칠궁은 청와대 안에 위치한 조선의 유물이다. 칠궁은 오래 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청와대 분수대 교차로에서 부암동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 담장 안으로 단정한 기와 지붕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썩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궁은 일반 유물처럼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쉽게 마음 먹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문제로 그나마 제한적으로 개방하던 것마저 중단돼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움을 주었다. 반면 칠궁에게는 고요한 휴식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칠궁은 이름도, 사당도, 정원도, 주변 경관도 어여쁜 곳이지만 그 역사를 들여다 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곳이다. 칠궁 안에 왕족과 사대부가 나눠 가진 조선의 편협한 사상과 차별, 독점, 편견 등이 모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칠궁의 출발이 어머니가 왕의 어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왕들의 효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사실은 또 다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누구의 것이었느냐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칠궁은 영조의 효심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 알려진 대로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이다. 죽은 뒤 받는 이름인 시호는 화경이다. 그녀는 일곱 살 때 궁궐에 들어와 무수리로 지내다 숙종의 눈에 들어 1693년에 아들 영수를 낳았으나 두 달 만에 죽었다. 다음해에 다시 임신했는데, 그 때 낳은 둘째가 연잉군(이금)으로, 훗날 영조가 되는 왕자의 탄생이었다. 왕의 눈에 띄어 침실에 들고 2년 연속 아들을 낳았으니 최 씨는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종4품–종2품 숙의–종1품 귀인를 거쳐 숙종25년 1699년에는 단종 복위 기념으로 정1품 빈의 지위를 받으며 숙빈최씨가 되었다. 정1품이면 조선에서 제일 높은 관직이다. 숙종의 왕자를 낳고 정1품까지 올랐으니 일곱 살 때 궁궐에 들어와 무수리로 살던 여자의 삶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그러나 정1품에 올랐다고 무수리 출신 후궁이라는 주홍글씨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삼문, 풍월헌 등으로 들어가는 재실 정문.영조는 숙종과 희빈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의 배다른 동생이었고, 경종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조선 최초로 세자가 아닌 세제 책봉을 받는다. 왕의 동생으로 왕의 대를 잇는다는 뜻이다. 일련의 모든 일들은 당시 경종, 영조의 생각이었으나 이것은 계획대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노론, 소론 등 실질적으로 나라의 주인 행세를 한 정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왕, 백성, 국가를 조정한 결과였다. 영조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라는 이유로, 왕비의 자식이 아닌 후궁, 그것도 무수리 출신 후궁의 자식이라는 점 등을 들이대며 능멸을 서슴지 않은 사대부들에 의해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즉위 이후에도 ‘우리 덕에 임금이 되지 않았소’라는 특정 정파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긴 51년7개월 동안 왕으로 지냈고 수명도 81세5개월이라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천수라 할 만큼 오래오래 살았다. 51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싶지만, 특히 그는 어머니 숙빈최씨를 제대로 대우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했다. 효도 하면 정조를 떠올리곤 하지만,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극진함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숙빈최씨는 숙종 44년 1718년에 죽었다. 그녀의 나이 49세 때의 일이었다. 장례는 조선의 법도에 따라 거행되었으나 명당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명당을 추천한 사관을 귀양 보내는 등 그나마 후궁으로서 대접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기록은 숙종이 숙빈최씨를 미워한 결과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 정파 간의 피 튀기는 싸움에 말려들 수 없는 왕의 고뇌가 추측되기도 한다. 숙빈최씨는 이렇게 왕자의 어미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말년을 보내다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아들이 왕이 되는 그 영광도 맛보지 못한 채 말이다. 어미의 쓸쓸한 죽음을 보면서도 숨 죽인 채 살아야 했던 영조의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 칠궁의 출발은 바로 이런 복잡하고 억울하며 저주스럽고 답답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왼쪽- 풍월헌 송숙제 삼락당을 아우르는 뜨락. 이 시설들은 모두 영조와 칠궁 관리를 위해 건축되었다, 삼락당, 한 건물에 있는 송숙제와 풍월헌 / 오른쪽- 중문으로 들어가야 본격적인 사당들을 만날 수 있다, 육상궁으로 들어가는 삼문. 삼문의 가운데 문은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다. 사람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는 게 조선이 예법이다, 보광사왕도 어쩌지 못하는 그놈의 법도칠궁 관람은 재실 정문에서 시작된다. 칠궁은 북악산과 청와대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고립된 섬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청와대가 붙어 있어서 그쪽을 향해서는 사진을 찍는 일도 금지되어 있고, 서쪽과 북쪽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북악산은 청와대 외곽 경비를 위한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어서 얼씬도 할 수 없다. 오로지 남쪽 재실 정문과 외삼문으로만 들어갔다 나올 수 있다. 외삼문은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는 한 늘 닫혀있으므로 일반 관람객은 오직 재실 정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다. 재실 정문으로 가려면 길 건너편 무궁화 동산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칠궁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파란색이 되었을 때 비로소 길을 건널 수 있고, 그때서야 외삼문 옆 안전 펜스도 열린다. 재실 정문은 고궁이나 전통 한옥에서 흔히 보아왔던 평범한 모습이다. 필자가 찾은 그날 칠궁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깨끗한 마당, 심지어 소담스럽게까지 보이는 하마비, 재실와 업무 공간으로 사용했었다는 송죽재, 풍월헌, 삼락당의 단정한 지붕 뒤로 멀어져 가는 가을이 절정의 색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뒤로는 북악산 봉우리가 통째로 눈에 들어오고 있다. 이곳이 경복궁인지, 자그마한 칠궁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제사를 위해 육상궁을 찾은 영조가 휴식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풍월헌, 육상궁을 관리하던 공무원들의 업무 공간이자 한때 영조의 어진을 모셔두었던 송죽재, 그리고 숙빈최씨에 대한 존경심을 높이기 위한 크고 작은 행사와 토론이 펼쳐지곤 했던, 응접실 역할을 하던 곳이 삼락당이다. 풍월은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뜻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만나는 고귀한 마음가짐을 뜻하고 있다. 삼락이란 가족의 안녕, 후학 양성, 윤리 등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즉 유교적 선과 좋은 의미의 언어들을 압축한 뜻을 지니고 있다. 보통 한옥, 궁궐의 구조를 보면 옆면에는 창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풍월헌의 동쪽 옆면은 창과 문이 달려 있다. 어머니의 영혼을 거리낌 없이 만나겠다는 영조의 애틋한 표시일 것이다. 풍월헌 뒷마당에는 담장이 있고 동쪽으로 중문이 나 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중문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삼문이 있다. 세 개의 문을 나란히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당 입구는 주로 삼문을 설치한다. 세 개의 문에서 가운데 문으로는 귀신이 들락거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제를 지내거나 예를 갖추고, 왼쪽 문으로 나오는 것이 예법에 맞는 일이다. 삼문 안에는 연호궁과 육상궁이 하나의 건물 안에 있다. 따로 짓지 않고 하나의 건축물에 두 사람의 신위를 모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창덕궁 건너편 종묘가 대표적인 예다. 종묘는 정전 안에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위와 49위를 모셔두었다. 또 하나의 건축물인 영녕전에도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 영녕전 모두 하나의 지붕이다. 칠궁의 건축물들이 분리되어 있는 게 오히려 위엄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면에 연호궁 편액이 걸려있지만 그 뒷쪽에 육상궁(육상묘) 편액이 따로 걸려 있다, 보광사조선의 법도란 무엇인가연호궁과 육상궁이 있는 건축물에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앞에 보이는 것은 연호궁, 뒤에 걸려 있는 것은 육상궁이다. 육상궁이 먼저 생겼으므로 그 후에 설치된 연호궁의 편액이 앞에 걸리게 된 것이다. 영조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죽었을 때 조정에서 거행한 예장에 대해 아무 소리 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평민의 장례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으나 누구도 장례 자체에 시비를 걸진 않았다. 영조가 어머니를 왕의 어미로 제대로 대접하기 위한 작업은 본인이 왕에 즉위한 직후부터였다. 영조는 즉위와 동시에 경복궁 북쪽, 그러니까 지금의 칠궁 자리에 어머니 숙빈최씨의 사당을 짓게 하고 신주를 모셨다. 숙빈최씨의 묘소의 이름은 소령원이었다. 조선 왕실의 분묘제도에 따르면 왕과 왕비의 묘에는 ‘능’ 자를 붙이고, 왕세자, 왕세자비, 숙빈최씨처럼 후궁이지만 자식이 왕위에 오른 경우 ‘원’ 자를 붙였다. 그 밖에도 왕의 후궁이었지만 왕의 어미가 되지 못한 후궁, 왕자, 공주, 옹주의 묘는 ‘분묘’라 불렀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숙빈최씨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묘는 후궁의 묘, 분묘로 조성되었었다. 훗날 영조는 어머니의 분묘를 소령묘, 소령원으로 승격시켰고, 숙빈최씨의 영혼을 위한 수행처로써 보광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보광사 안에는 특별히 어실각이라는 누각을 만들어 그 안에 숙빈최씨의 위패를 따로 보관했다. 또한 영조는 어머니에게 화경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 격식에 이름까지, 그러니까 족보를 분명히 한 것이다. 영조는 숙빈최씨의 무덤 격상을 통해 명예를 높여주고 경복궁 뒤에 사당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고, 시호(이름)까지 선사하는 것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표현했다. 칠궁이 생긴 계기가 숙빈최씨와 그의 아들 영조에 의한 일이었으니 사실상 칠궁의 주인공은 이곳 육상궁이라 할 수 있다. 육상궁과 함께 있는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의 사당이다. 정빈이씨는 영조에게 장남 효장세자를 선사한 후궁이었다. 효장세자는 그러나 아홉 살의 나이에 죽었고, 그 다음에 태어난 아들이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는 역시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이야기는 현대까지 역사적 사실로 이어오고 있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당시에는 혜빈 홍씨) 사이에서 아들 산을 낳았고, 산은 훗날 정조가 되어 조선 정치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정조는 세자의 아들이었지만, 폐세자가 된 사도세자의 아들 자격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해서 영조는 산이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다. 아홉 살에 죽은 효장세자가 정조의 아버지가 되어버리니, 당연히 효장세자는 진종이라는 이름의 왕으로 추존되었고, 효장세자의 왕세자비였던 정빈이씨 역시 추존 왕비가 되어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연호궁은 원래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경복궁 서쪽 옆길 효자로 19 일대, 지금은 터의 일부만 남아 있다)에 있었으나 고종 7년 1870년에 육상궁 별묘로 옮겨진 뒤 육상궁과 합쳐졌다. 사당 세 채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수빈박씨의 묘소. 휘경원은 광릉 안에 위치한다(사진 문화재청), 냉천이 흘러들어오는 연못 자연과 냉천정. 칠궁 풍광의 대표적인 관람 포인트 중 하나이다.조선은 정녕 왕의 국가였나육상궁을 나와 서쪽으로 조금 걸으면 냉천정을 만날 수 있다. 어머니의 제사 때면 이를 추모하던 영조의 공간이었다. 냉천정 역시 풍월헌과 마찬가지로 한옥 옆 면에도 문이 달려 있어서 어머니의 영혼과의 교감을 소망한 영조, 유교국가 조선의 풍속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칠궁을 걸으면서 제일 보기 좋고 재미있던 공간이 냉천정 일대이다. 이 건물의 이름이 냉천정이 된 것은 바로 옆 냉천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냉천에서 솟아오른 물은 수로를 따라 흘러가 냉천정 앞에 있는 자연이라는 이름의 연못으로 모인다. 자연과 냉천정을 마주 보고 자연 오른쪽 끝부분에서 사진을 찍으면 냉천정과 자연에 비친 냉천정 풍경을 담을 수 있다. 칠궁은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대부분 작품이 된다(물론 렌즈를 청와대 방향으로 향하면 해설사로부터 단박에 지적을 당하게 된다). 누구나 칠궁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냉천정 앞에서의 촬영 순간이 좋았다. 냉천정 촬영 포인트를 해설사께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는데, 하늘과 물과 사물이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다는 것이 신비했다. 냉천정 뒤로는 작은 뜨락이 있는데, 담장 옆에 원두막 같이 생긴 정자 한 채가 있다. 그런데 그 정자로 향하는 길이 어디에도 없다. 아예 뜨락으로 접근할 방법도 없다. 칠궁이 돌아가신 왕의 어미들의 신주를 모신 곳이니, 이곳의 정자 역시 그분들께서 휘휘 날아 와 엄격했던 법도 국가 조선을 추억하곤 했던 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서쪽 삼문으로 들어가면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있다.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은 나란히 서 있는데, 어떤 궁은 기둥이 둥글고 또 어떤 궁의 기둥은 사각 모양이다. 또한 문살의 형태도 궁에 따라 생긴 게 달랐다. 지금은 한 곳에 모여 있지만, 각각의 사당이 건립될 때만 해도 건축가와 해석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이자 추존왕인 원종의 어머니 신주를 모신 곳이다. 저경궁을 지어 모실 것을 명한 왕 역시 영조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을 조선 왕실의 법도 안에 넣으려는 시도를 치밀하게 했다. 인빈김씨의 정경궁과,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선희궁 등 자신 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머니들의 사후 관리를 골고루 체계적으로 함으로써 어머니 숙빈최씨의 신분 격상의 명분을 쌓아간 것이다.오른쪽- 인빈김씨 남양주 순강원(사진 문화재청), 정조의 후궁 수빈박씨의 경우궁 저경궁 옆 대빈궁은 장희빈, 희빈장씨의 사당이다. 희빈장씨는 숙종의 후궁이 된 후 숙종이 왕위를 계승한 경종의 어머니였고, 끝내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결국 폐비된 후 사약을 먹어야 했던 굴곡의 인생이었다. 어느날 궁궐에 입궁하는 사람 뒤에는 늘 특정 정파의 사연과 계획이 있었다. 입궁한 여인이 왕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역시 그녀를 입궁시킨, 또는 입궁 뒤 특별한 관계를 맺은 정치 세력의 움직임이 인다. 그 과정에는 늘 암투가 따랐다. 왕은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은밀한 협박을 가해오는 정치 세력에 의해 진심으로 사랑하는 후궁, 심지어 왕비까지 내치거나 죽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곤 했다. 오늘의 가치로 볼 때 국가는 국민의 것이다. 반면 조선이라는 봉건사회는 왕과 사대부가 소유한 국가였다. 그중 왕의 권력을 넘어설 세력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칠궁의 뒷얘기만 찾아보아도 조선의 왕들은 결코 절대 지존으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법도를 들이대며 왕의 마음까지 움직이려 했지만 그 왕이 끝내 뜻을 달리하면 정치 세력에 의해 권력의 중심이 뒤바뀌었던 나라. 조선은 결코 왕의 나라는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그 다음은 선희궁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사당으로 1908년부터 경우궁과 함께 있다. 경우궁은 정조가 사랑했던 후궁 수빈박씨의 사당이다. 덕안궁은 삼문과 마주보는 마당 한가운데에 있다.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엄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엄씨는 원래 경운궁(덕수궁) 안 경선궁에 살았으나 1911년 세상을 뜨자 이름을 덕안궁으로 바꿨고, 1913년 덕수궁 근처에 사당을 새로 지어 모시다 1929년 칠궁 안으로 들어왔다. 칠궁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왕의 어머니들은 살아 생전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왕자를 생산했을 때에도 호사를 누리며 사는 대신 정쟁의 살얼음판을 살금살금 걸으며 살아야 했던 운명들이었다. 왕의 어머니가 대접을 받는 게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워서야. 칠궁은 영원히 알 수 없을 조선의 복잡한 법도,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파 간의 암투, 여전히 풀리지 않는 여성의 옥죄인 삶 등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눈은 호사롭지만 마음은 복잡해진다. 어떤 의미에선 진짜로 귀신이 나오는 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재실 문 밖 오늘의 세상으로 나왔다. 이곳에 계시는 모든 왕의 어미들의 명복을 빌면서 말이다. Tip: 칠궁 관람법-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칠궁 관람’을 검색하면 경복궁 사이트로 연결된다. 해당 페이지에서 칠궁 관람일을 예약할 수 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관람 가능하다. 시간은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등 7회로 모든 관람은 해설사가 운영한다. 회당 50명까지 예약을 받는데, 간혹 자리가 비거나 노쇼 예약자가 생기곤 한다. 사전 예약을 하지 못했다면, 칠궁 건너편 무궁화동산 안내부스에 가서 관람 가능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노쇼 예약자가 없을 경우엔 관람이 어려우니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을 마치도록 하자. (이영근, 문화재청 참고 자료 문화재청)갯벌에 파묻힌 덕에 온전한 형태 조선 초 궁궐 용머리 장식기와 발굴조선 후기 궁궐인 창덕궁 인정문의 취두. 검파의 형태가 단순한 봉 형태로 돼 있다. /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 청포대 갯벌 일대에서 출토된 취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 청포대 갯벌 일대에서 출토된 검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시대 왕실 건축물의 지붕을 장식하던 용머리 장식기와(취두·鷲頭)의 온전한 형태가 확인됐다. 이 유물은 조선시대 전기 건축물의 세부 모습에 대한 실질적인 고증이 가능한 유일한 자료로 평가된다. 2022. 6. 29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올해 5월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 청포대 갯벌 일대에서 발굴한 ‘취두’ 상단과 취두 상단에 부착하는 칼자루 모양 장식품 ‘검파’(劍把)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취두 상단은 지난 2019년 조개를 캐던 주민이 발견해 신고한 취두 하단과 결합하는 유물이다. 검파는 지난해 6월 연구소가 인근 지역에서 추가로 발굴한 또 다른 취두 상하단과 쌍을 이루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 전기 검파의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파가 발견되면서 건물 용마루에 올라가는 취두가 온전한 모습을 찾았고, 건물을 수호하거나 권위를 돋보이게 한 특수기와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또한 경복궁 창건기 건물과 숭례문, 양주 회암사지 등 조선 전기 왕실 건축물의 세부 모습을 실질적으로 고증하는 유일한 자료라는 평가도 나온다. 검파는 길이 40.5㎝, 폭 16㎝, 두께 7㎝ 크기의 칼 손잡이 모양이다. 앞뒷면에 2단으로 구름무늬가 표현돼 있고, 취두 상단의 방형 구멍과 결합하도록 짧은 자루도 갖추고 있다. 검파는 빗물이 취두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됐다. 취두에 표현된 용이 지붕을 물고 있어 더 이상 용마루를 갉아 먹지 말라는 의미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번에 발굴된 구름무늬 검파는 현재 창덕궁 인정문 등 조선 후기 궁궐의 취두에 일부 남아있는 간략한 봉 형태의 검파와 차이가 있다. 또한, 한 쌍의 취두 하단부에 부조된 용 문양의 표현에서도 갈퀴의 표현 방식과 구레나룻 사이의 돌기 개수 등이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 전기만 해도 규격화된 형태의 용의 도상(圖像)을 마련, 이를 엄격하게 적용한 결과라고 해양문화재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취두와 검파는 서울의 용산구 일대에서 만들어져 충남 이남의 왕실 관련 건물로 수송되던 중 선박이 침몰하면서 갯벌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왕의 초상을 모신 전주 경기전 등이 대표적인 왕실 관련 건물이다. 아울러 취두의 무게 덕분에 파도에 휩씁리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취두와 검파 발굴조사 위치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김동훈 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취두는 충청, 전라, 경상 지방의 왕실 관련 사찰이나 행궁 등의 건축물에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해양문화재연구소는 8월 중순까지 해당 지역에서 추가 발굴 조사와 수중탐사를 진행해 관련 유물이 더 있는지 확인하고, 동시에 이 일대 해역의 고선박 존재와 왕실 장식기와의 생산·유통 등에 관한 연구도 추진할 계획이다. (서울=뉴스1)태안 갯벌서 대형 용머리 장식기와 발굴2021년 태안 청포대 갯벌에서 나온 '취두'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충남 태안 청포대해수욕장(남면 원청리) 갯벌에서 조선 전기 왕실 관련 건축물의 지붕을 장식하는 데 쓰인 대형 용머리 모양 장식기와(취두·鷲頭) 한 개체(2점)를 발굴했다고 2021.8.19일 밝혔다. 조선 전기 취두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된 것은 처음으로 오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취두를 공개한다.취두는 높이 103㎝, 최대 너비 83㎝의 크기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용의 머리 위에 작은 용 한 마리와 나선형의 음각선이 표현돼 있다. 용의 얼굴은 입체적이고 사실적이면서 위엄이 있으며, 비늘이나 갈기, , 주름의 표현이 정교하다.취두와 함께 공개되는 장수상은 높이 30㎝, 최대 너비 22㎝다. 몸에 갑옷을 두르고 좌대(座臺)에 앉아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린 모습이다. 경복궁이나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장수상과 형태, 문양 표현 방식 등이 같다.조선시대에는 궁궐 등 건축물의 지붕에 취두, 장군상을 비롯한 잡상(雜像) 등 장식기와를 사용했다. 취두는 주로 위·아래로 나뉜 두 부분 또는 세 부분으로 분리해 만든 다음, 지붕에 얹을 때는 쇠못으로 고정해 연결했다. 잡상은 추녀마루 위를 장식하는 여러 가지 모양의 기와로 장수상을 맨 앞에 배치한다. (강구열 세계일보기자)역대 명필가 42인 글씨 엮어 만든해동명적(海東名迹) 국역서 해동명적 국역서. 영주 소수박물관 제공우리나라 역대 명필가들의 글씨를 한데 모은 국역서를 만나볼 수 있다. 영주 소수박물관은 명필가들의 글씨를 엮은 ‘해동명적(海東名迹)’ 국역서를 발간했다. 2021.7.27일 영주시에 따르면 해동명적은 1515년 신공제(申公濟)가 신라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종, 성종, 최치원, 김생 등 명필가 42인의 글씨를 모아 목판으로 새기고 이를 탁본해 서책으로 간행한 법첩(法帖)이다. 이후 1530년 경상도 관찰사 최세절(崔世節)이 석판본을 다시 간행했다. 총 169면으로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지만 완질본은 없다. 소수박물관이 소장 중인 해동명적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18호이다. 가장 많은 137면을 수록하고 있다. 이번에 발간한 해동명적은 소수박물관 소장본을 중심으로 했다. 누락된 부분은 경주 독락당 소장본, 경주 서백당 소장본,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의 고화질 이미지 파일을 협조받아 완질본으로 발간했다. 크기와 색상은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렸다. 해동명적 국역본은 소수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다.송준태 소수박물관장은 “이번에 발간한 해동명적은 지금까지 문헌자료가 없던 15세기 이전 명필가들의 희귀한 필적을 다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서예사 연구 자료로 매우 가치가 크다”며 “문헌사와 출판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업적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영주=배소영 세계일보 기자)상상속의 궁궐 ‘한궁도’ 한궁도’(漢宮圖)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 회화 양식 가운데 하나다. 실재하는 조선의 궁궐이 아닌 상상 속 중국 궁궐 건축물을 표현한 것인데 상상의 궁궐과 신비스러운 느낌의 산수가 조화를 이루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국적이고 화려한 느낌도 준다. 한궁도에는 왕실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30일 궁중서화실 회화 유물을 전면 교체해 한궁도 5점을 새로 선보인다고 밝혔다. 한궁도는 대부분 6∼10폭 병풍이며, 풍경을 강조한 ‘산수누각도’ 유형과 건축물을 돋보이게 그린 ‘궁궐누각도’ 유형으로 나뉜다. 한궁도는 국내에 10여점이 존재한다고 알려졌는데, 박물관이 소장한 5점이 동시에 전시되기는 처음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전시실에 나온 한궁도 5점은 화풍이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며 “서양 화법 영향을 받은 작품은 우리나라 전통 회화와는 구도가 다르고, 풍경이 상당히 이국적”이라고 설명했다. 한궁도 5점과 함께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책가도’(冊架圖)를 각각 1점씩도 새롭게 관람객들과 만나게 된다.박물관은 전시실 개편에 맞춰 한궁도 속 장면을 담은 휴대전화 배경화면을 제작했다. 파일은 박물관 홈페이지의 ‘궁중서화’ 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강구열 세계일보 기자) 오대산의 고승 1차분 3권의 표지. - 민족사 제공국립 조선왕조실록 박물관, 21세기 '史庫'역할을 기대하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의 제1대 국왕 태조(太祖)부터 제25대 철종(哲宗)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으로 정리한 조선의 공식 국가기록물이다. 이 방대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역사적 사실을 모두 포괄하고 있어 한국학 각 분야 연구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필수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의 ‘공정성’ 측면에서도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실록보다 월등히 우수하다. 실록 편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사관(史官)의 사초(史草)는 왕도 볼 수 없도록 엄격히 규제했는데, 이는 사관들이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중요 국가기록물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설치하고 이곳에 실록을 보관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지방 사고를 섬이나 깊은 산중에 설치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이 모두 소실되는 피해를 겪으면서 실록의 ‘안전한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조?




